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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와 동아미디어그룹의 지나온 발자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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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3.15 4·19혁명의 견인차

1959년 4월 30일 경향신문이 폐간되자 본보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획책을 간파하고 줄기찬 반정부 투쟁을 벌여 4·19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5월 2일자에 ‘왜 신문을 폐간시켰는가’ 제하의
사설로 포문을 열어 경향신문 폐간의 부당성부터 조목조목 지적했다.
엄청난 부정선거 계획이 노골화되자 1960년 3·15선거를 앞두고
전국에선 학생과 시민들이 연일 시위를 벌였다. 본보는 다시 3월 11일
자 ‘천인이 공노할 만행’ 제하의 사설에서 “가능한 한 모든 투쟁을
전국민의 이름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고
사실상 정권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했다.
3·15선거가 공포분위기와 공개투표, 테러 등에 의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로 얼룩지자 전국적인 항의데모 속에 마산에서는 군중이
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4월 11일 경찰의 무참한
학살로 밝혀진 김주열 군 사망사건은 마산을 폭발시키고 4월 19일
서울에서는 10만 명의 대학생과 수만 명의 중고교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경무대 앞까지 몰려가 경찰과 대치하며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동시에 경찰은 시위대에 발포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결국 이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이기붕 일가는 집단자살로 이승만 정권의 종언을 고했다.

1961 06.04 언론 목 조른 5·16군사정변

5·16군사정변 세력은 5월 27일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대체하면서 형식상
사전검열은 없앴지만 언론에 꼼짝달싹할 수 없는 재갈을 물렸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정부를 비방할 목적의 허위사실 날조 유포행위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고, 반공법에 ‘반국가단체와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1960년대
대부분의 필화사건은 이들 조항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이는 기자들에게 사실상
기자실과 화장실의 출입만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본보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조속한 민정 이양’을 요구한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군사정권과 첫 충돌을 했다. 이로 인해 당시 편집국장, 정경부 차장과
이만섭(전 국회의장) 이진희(전 문공부 장관) 기자가 연행돼 두 기자는 한달 이상
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기자들이 빈번하게 연행되고 구속됐다.
5·16군사정권은 당시 조석간제이던 신문발행을 단간제로 바꿀 것도 강요했다.
“정치 기사가 너무 많아 국민이 정치에 지나치게 민감하며 이에 따라 신문이
재미없어 독자가 늘지 않는다”는 명분이었다. 본보는 이때 석간을 선택했다.

1963 04.25 동아방송 개국과 폐국

4·19혁명 이듬해인 1961년 1월 16일 민주당 정부에 의해
방송국(콜 사인 HLKJ) 설립 가허가를 받은 지 2년 3개월 만인
1963년 4월 25일 오전 5시 30분 3개월 만인(DBS)은 첫 뉴스
보도로 탄생을 알렸다.
관영방송인 KBS와 민영방송인 MBC, CBS에 이은 것이지만 3
개월 만인은 일간신문사가 운영하는 첫 방송으로서, 청취율은
그해 7월 18.9%(공보부 조사), 그해 9월 20%(연세대 조사),
이듬해 2월 33.5%(공보부 조사)로 급성장했다. 더욱이
동아방송은 수도권 일대에서만 청취가 가능했던 점을 감안하면
전국 방송인 KBS의 39.8%를 압도하는
수도권 청취율 50%에 이르렀다.
동아방송은 특히 뉴스에 중점을 두어 동아일보가 ‘보는
신문’이었다면 동아방송은 ‘듣는 신문’으로서 보완관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동아방송은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11월 30일 마지막 방송을 함으로써 17년의 짧은 일생을
마감했다.

1966 03.24 기자들에 잇단 정치테러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상과 협정비준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독주를 앞장 서
비판하고 반대하던 본보의 변영권 편집국장 대리의 자택이 1965년 9월 7일 밤
폭파되고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이 집에서 괴한에게 납치돼 몰매를 맞았다.
이어 당국은 10월 1일자 본보 사회면 ‘서울에 북괴 신문’ 제하의 기사를 문제 삼아
남중구 사회부 기자를 반공법 위반(찬양 고무) 혐의로 구속했다.
이듬해인 1966년 3월 24일 ‘독주(獨走)’시리즈 세 번째 기사인 ‘소신은 만능인가’를
쓴 최영철 정치부 기자가 4월 25일 밤 자택 부근 골목길에서 폭행을 당했고 이튿날
새벽에는 ‘구국특공단장’ 명의의 협박장과 함께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 2개가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7월 20일 밤에는 권오기 정치부 차장이 집 앞에서 2명의
괴한에게 폭행당하고 12월 29일에는 상이군경 50여 명이 본사 편집국에 난입해
집단 난동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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