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집권의 바탕을 마련한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운동이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 2호 선포로 금지됐다가 8월 23일 해제되면서 대학과
종교계 재야단체 야당을 중심으로 유신헌법의 폐지, 민주회복 운동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 와중에서 그해 10월 23일자 본보에 ‘서울 농대생
300명 데모’기사가 보도되자 중앙정보부는 당시 편집국장 송건호, 지방부장
한우석, 동아방송 뉴스 쇼 담당 부장 박중길을 연행했다.
기자들은 즉각 편집국에 모여 농성에 돌입해 이튿날 ‘외부 간섭 강력 배제’
‘기관원 출입금지’ ‘언론인의 불법연행 거부’ 등 3개항의 결의내용을 담은
자유언론실천 선언문을 발표했다. 10월 25일자에는 ‘왜 자유언론을
부르짖는가’ 제하의 사설을 실었다. 이후 본보는 금기사항(긴급조치
위반)이던 유신반대 집회 시위 기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해 하루 평균
7~10개의 대학가 시위 기사를 실었다.
이와 관련해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그해 11월 20일
언론통제에 맞서 투쟁하는 본사에 표창장을 보내 찬양했다. 급기야 그해
12월 16일경부터 정권의 압력을 받은 광고주들이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광고를 해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광고탄압 한 달 후 본보 광고는
98%가 떨어져 나갔다.
백지 광고가 나오기 시작하자 1만 건이 넘는 국내외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줄을 이었다. 돼지저금통을 털어온 어린이, 취로장 하루 노임을 몽땅 내놓은
노동자, 끼고 있던 금반지를 흔쾌히 빼준 독자도 있었다. 광고는 이듬해 7월
16일부터 재개됐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 야당’을 내세운
김영삼 씨가 새 총재로 선출되면서 유신 정국은 암운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8월 9일 YH무역 여공 170여 명이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 4층 강당을 점거하고 노사분규 문제로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은 해산 종용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자 이틀
뒤인
8월 11일 심야에 기습 연행작전을 감행했으며 이 와중에서
여공 1명이 투신 자살하고 신민당 의원들과 취재기자들도 함께
부상 또는 연행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본보는 유신 말기의 단말마적인 정부 압력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경찰의 해산 작전을 대서 특필해 정국은 일시에
격랑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이성을 잃은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 내부와 법원, 국회를 조종해 8월 11일 김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10월 4일 의원직 제명을 강행했다.
드디어 10월 22일 부산 마산 일원에서 폭발한 부마(釜馬)
항쟁은 정권의 내분과 10·26사태를 부르는 계기로 작용했다.
유신정권 붕괴 과정에서 본보는 고비고비마다 다른 언론사를
훨씬 능가하는 취재와 비판으로 정국 상황을 주도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