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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와 동아미디어그룹의 지나온 발자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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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05.15 광주민주화운동과 동아일보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후 19~23일 초기 5일
동안 본보는 무사설(無社說)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울시청에 설치된 군(軍) 언론검열단은 첫날부터 사설을
‘토막시체’로 만들어 돌려보냈다. 토막난 채로는 논리가 구성되지
않아 사설로 게재할 수 없었다. 다음 날에도 표현만을 조금씩 바꿔
비슷한 내용의 사설을 실으려 했지만 검열단은 여지없이 빨간
줄을 그어댔다.
1면 만평인 ‘동아희평’(백인수 화백)과 사회면 시사만화인
‘고바우영감’(김성환 화백)도 실리지 않은 날이 많았다. 5월 27일
진압이 끝날 때까지 일요일을 제외한 13일 동안 동아희평은 11
일간, 고바우영감은 8일간 지면에서 사라졌다. 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대법원 판결을 앞둔 어느 날에는 ‘김씨는 사형이
마땅하다’는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의 글을 싣도록 압력을
받은 일도 있었으나 본보는 “재판 계류 중이어서 곤란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광주민주화운동 초기 광주 전남 지역에서는 본보 기자만이
시위대에 접근해 취재가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언론사 기자
중에 본보 기자를 사칭하는 경우가 많아 이 일대에는 난데없이
‘동아일보 기자’가 들끓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1987 05.03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연속 특종

1987년 1월 15일 이 사건 첫 보도는 중앙일보에 빼앗겼지만 그 다음부터는 본보의
연속 특종보도로 6월민주항쟁을 촉발하는 원인이 됐다. 요지부동이던 전두환 정권의
‘호헌(護憲)’입장은 드디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약속으로 바뀌어 6·29선언이 탄생하게
됐다. 사건 초기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은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쇼크로
숨졌다며 "조사 경찰관이 책상을 ‘탁’ 치니 박 군이 ‘억’하고 쓰러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본보는 박 군 삼촌의 증언을 통해 수십 군데 멍자국이 있었음을 밝혀낸 데 이어
최초 부검의사의 증언에 의해 물고문 등 각종 고문 의혹을 제기했다.
고문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내무장관과 치안본부장이 해임되고 가담 경찰관 5명이
구속됐으나 본보는 다시 대공수사 간부들의 범인 축소 및 사건은폐조작 모의 사실을
폭로했다.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정부는 노신영 총리와 안기부장, 내무
법무장관, 검찰총장, 안기부 1차장, 치안본부장 등 시국 관련 내각을 전면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보는 이에 그치지 않고 “사건 초기 치안본부장 등 경찰 수뇌부가 고문 치사
사실을 알고도 이를 은폐 조작했다”는 부검의사의 일기장 내용을 폭로해 해임에
그쳤던 치안본부장까지 구속되게 만들었다. 본보는 당시 서울시내 가판 판매에서만 40
만 부를 넘기는 놀라운 신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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